독후감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 - 차인표
drzek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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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24일 AM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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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화면이 보였다. 문장을 따라가는데 머릿속에서는 장면이 재생됐다. 백두산 아래 안개 낀 산, 진흙탕이 된 논바닥, 밤하늘. 작가가 30년 넘게 카메라 앞에 섰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읽었더라도 눈치챘을 것 같다. 문장이 시각적이라기보다, 이야기를 장면 단위로 끊어서 배치하는 감각이 몸에 밴 사람의 글이다.

배경은 일제강점기, 백두산 아래의 한 마을이다. 작가는 1997년 캄보디아에서 5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훈 할머니의 사연을 접하고 이 이야기를 구상했다고 한다. 끌려가기 전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를 상상해서 쓴 소설이다.

이야기는 사람과 호랑이가 함께 살던 옛 마을에서 시작한다. 마을의 평화를 처음 깨뜨린 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임금이 호랑이 가죽을 얻으려 사냥을 시작하면서 산과 마을 사이가 벌어지고, 그 틈은 세대를 거치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으로 옮겨 간다.

이 구조가 이 소설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후반부의 폭력은 갑자기 등장하지 않는다. 호랑이 사냥에서 인간에 대한 폭력까지 이어지는 경로가 이야기 안에 이미 깔려 있다. 짐승과 더불어 살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과도 더불어 살 수 없다는 말이 초반에 나오는데, 소설 전체가 그 말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굴러간다.

- 편을 나누지 않는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선악의 배치 방식이다.

조선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선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마을 아이들은 시기심에 사고를 치고, 그 사고가 비극의 도화선이 된다. 어른들도 두려움 앞에서 비겁해진다. 반대로 일본군 쪽에도 이름과 얼굴이 있는 인물이 있다. 명령과 자신 사이에서 흔들리는 사람이 있고, 어머니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

한일 관계를 다룬 이야기에서 이건 쉽지 않은 선택이다. 이런 소재는 대체로 가해자를 얼굴 없는 악으로 처리하는 쪽이 안전하고 반응도 좋다. 작가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진흙탕이 된 논바닥에서 흰 옷과 제복의 구분이 사라지고 그냥 사람들만 남는 장면이 있는데, 이 소설의 태도가 여기 다 들어 있다. 서술은 담담하다. 감정을 얹지 않고 상황을 보고하듯 적는다.

그런데 이 담담함이 오히려 서늘하다. 진흙 한 겹으로 지워질 정도의 구분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를 죽였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일본군을 악마화하지 않는 것은 가해를 봐주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를 보게 만들기 때문에 더 무섭다.

작가는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위안부 문제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다고 한다. 그런데 부정적 감정만으로는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아이에게 이 문제를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방향을 바꿨다고 했다. 그 전환이 지금 이 소설의 태도를 만들었다고 본다.

용서를 다루는 방식도 같은 맥락이다. 이 소설에서 용서는 사과를 받았기 때문에 성립하는 거래가 아니고,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증오에 삶을 통째로 내주지 않겠다는 선택에 가깝다. 방향이 가해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 있다. 그래서 피해자에게 관용을 요구하는 문장이 되지 않는다. 식민 지배와 성폭력의 역사를 배경에 두고 용서를 말하는 건 자칫 가해를 흐리는 일이 되는데, 작가는 그 함정을 피해 간다.

- 영화 같다는 것의 양면

앞에서 화면이 보였다고 썼는데, 이건 장점이면서 동시에 이 소설의 호불호가 갈릴 지점이기도 하다.

장면 전환이 빠르고, 각 장면이 명확한 그림을 남긴다. 인물의 감정을 길게 설명하는 대신 행동과 대사로 보여 준다. 읽기가 편하고 몰입도 잘 된다.

문제는 클라이맥스다.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가 뚜렷한 절정을 향해 조여드는데, 그 방식이 소설보다 영화의 문법에 가깝다.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고,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고, 감정이 폭발한다. 잘 만들어진 장면인 건 분명하다. 다만 그 시점에서 나는 이야기 안에 있다가 슬쩍 밖으로 밀려났다. 아, 여기가 클라이맥스구나, 하는 자각이 먼저 왔다.

소설이 주는 여운은 대개 절정보다 그 언저리의 애매한 것들에서 온다. 설명되지 않은 채 남는 감정, 결론을 내지 않는 대목 같은 것들. 이 소설은 그런 여백을 남기기보다 감정을 확실하게 마무리 짓는 쪽을 택했다. 그게 좋았다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실제로 마지막 장면에서 울었다는 후기가 많다. 나는 조금 아쉬웠다. 더 헐겁게 끝났다면 더 오래 남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읽은 『인어 사냥』에서도 비슷하게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은 좋은데 마지막이 지나치게 정돈된다는 인상이었다. 작가의 개성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건 결함이라기보다 취향의 문제에 가깝다. 이야기가 확실하게 매듭지어지는 걸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오히려 이쪽이 미덕일 것이다.

- 옥스퍼드 한국학 필수도서

2024년, 이 책이 옥스퍼드대 아시아·중동학부 한국학 전공의 필수 도서로 지정됐다. 같은 해 6월에는 제1회 옥스퍼드 한국 문학 페스티벌에 작가가 초청돼 강연도 했다.

이 책의 이력을 보면 이 소식이 더 특이하게 느껴진다. 원래 2009년에 『잘 가요 언덕』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가 팔리지 않아 2018년 절판됐고, 2021년에 청소년 독자를 겨냥해 지금 제목으로 복간된 책이다. 한 번 사라졌던 책이 15년 만에 해외 대학 교재가 된 셈이다.

한국학 전공 학생들이 이 책으로 위안부 문제를 처음 접한다는 점에서는 우려도 있다. 실제로 그런 지적을 하는 독자 후기를 봤다. 이 소설이 그리는 세계가 실제 역사보다 온화하고, 그 온화한 버전이 참혹한 현실을 대체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다. 타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피해의 실상을 직시하는 종류의 기록물이 아니다.

다만 교재로서의 위치를 생각하면 조금 다르게 볼 여지도 있다. 한국학은 어학만이 아니라 역사와 문학을 함께 다루는 전공이고, 학생들은 이 소설 외에도 같은 시기를 다룬 사료와 연구서를 읽게 된다. 그렇다면 이 책의 자리는 사실을 전달하는 쪽이 아니라, 그 사실을 자기 문제로 감각하게 만드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문학이 교재로 쓰일 때 맡는 역할이 대체로 그렇다. 물론 그건 이 책 다음에 읽을 책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이 책 하나로 끝난다면 앞의 우려가 맞다.

- 남는 것

이 책의 미덕은 절제에 있다. 소재만 놓고 보면 얼마든지 격해질 수 있는 이야기인데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분노를 요구하지도, 눈물을 재촉하지도 않는다. 대신 질문을 남긴다. 당신이 그 시대에 있었다면 어땠겠는가. 지금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250쪽 남짓한 소설을 완성하는 데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잘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남겨야 할 이야기를 남기려고 붙들고 있었던 쪽에 가까워 보인다.

제목이 가정법인 점은 계속 마음에 걸린다. '바라본다면'. 아직 오지 않은 일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여전히 다른 것을 보거나, 아예 고개를 들지 않고 산다. 그래도 가정법에는 가능성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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