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zekil (106.♡.120.37)
2026년 7월 20일 PM 02:02
'이방인'을 읽으며 가장 먼저 든 물음은 제목의 주인이 누구인가였다. 1부를 읽는 동안 나는 그것이 뫼르소가 총을 쏜 아랍인이라고 생각했다. 이름도 없이 '아랍인'으로만 불리는 사람들, 서사의 배경으로만 존재하다 죽음으로 사라지는 존재들. 그들이야말로 이 소설 속의 이방인처럼 보였다.
그런데 2부로 넘어가면서 시선이 뒤집혔다. 법정에 선 뫼르소는 자기 재판의 주인공이면서도 철저히 구경꾼이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이야기하지만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 대해 말하는 것 같고, 그 자신도 그 자리에 어울리지 못한다. 이방인은 아랍인이 아니라 뫼르소였다. 정확히 말하면, 사회가 요구하는 감정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이방인으로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 소시오패스가 아니라
읽는 내내 뫼르소가 불편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그는 슬픔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날씨가 덥다고, 커피를 마셨다고, 관 앞에서 담배를 피웠다고 말한다. 마리가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도 그건 아무 의미 없는 말이지만 아마 아닐 거라고 답한다. 타인의 감정을 읽어내는 대신 외적인 것만 묘사하는 이 태도가 처음에는 소시오패스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 읽고 나서 생각을 고쳤다. 소시오패스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거나 타인을 도구로 쓴다. 뫼르소는 그렇지 않다. 그는 감정을 느끼되 그것을 사회가 정한 방식으로 번역하기를 거부할 뿐이다. 슬픔을 슬픔이라 이름 붙이고 사랑을 사랑이라 선언하는 그 언어의 규약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요즘 흔히 말하는 극단적 개인주의자 쪽이 훨씬 가깝다. 남이 기대하는 반응을 연기하지 않고, 사회적 각본을 따르지 않으며, 그 대가로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
결정적인 것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사제가 찾아와 신을 이야기할 때 뫼르소는 처음으로 폭발한다.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이 사람은 감정이 없는 게 아니구나. 있는데도 그동안 쓰지 않았을 뿐이구나. 아니, 어쩌면 그가 평생 유일하게 참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남이 자기 삶의 의미를 대신 규정하려 드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그는 자신이 무엇을 지키며 살았는지 말로 꺼내놓는다.
- 순교자라는 해설에 대해
민음사판 뒤표지와 해설은 뫼르소를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순교자'로 소개한다. 카뮈 자신이 미국판 서문에서 비슷한 말을 했으니 근거 없는 해석은 아니다. 거짓말을 거부한다는 점, 사회가 요구하는 감정의 연기를 끝내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뫼르소에게는 분명 그런 면이 있다.
그런데 이 설명은 작품의 일부만 감당한다. 순교자라는 틀로는 살인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뫼르소가 아랍인을 쏜 것은 어떤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햇빛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 진술의 부조리함이야말로 이 소설의 핵심인데, 순교자 해석은 그 부분을 조용히 비켜간다.
더 곤란한 것은 이 해석이 뫼르소를 영웅으로 만들면서 죽은 사람을 다시 한번 지운다는 점이다. 아랍인은 이름이 없고, 재판에서도 그의 죽음은 거의 논의되지 않는다. 법정이 심판하는 것은 살인이 아니라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남자의 인격이다. 이 기묘한 부재는 소설의 결함이라기보다 식민지 알제리라는 배경이 작품에 남긴 흔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뫼르소를 순교자로 읽는 순간, 우리는 그 부재를 한 번 더 반복하게 된다.
- 남는 것
나에게 '이방인'은 진실을 위해 죽은 사람의 이야기라기보다, 감정을 사회의 문법대로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괴물로 취급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남았다. 재판은 그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와 다르게 느끼기 때문에 유죄를 선고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뫼르소를 온전히 편들 수 없다. 그는 사람을 죽였고, 그 죽음은 이 소설 안에서 끝내 제 무게를 갖지 못한다. 이방인이라는 제목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뫼르소는 사회에 대해 이방인이었지만, 죽은 아랍인은 이 소설 자체에 대해 이방인이었다. 두 겹의 이방인 중 두 번째 것을 해설들은 잘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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